열린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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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자세(벧전3:8-12, 송재국.2006-05-28)
   관리자   | 2006·08·14 18:17 | HIT : 790 | VOTE : 116 |


본문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8)라고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벧전2:18-3:7절까지의 권면을 마무리하면서 섬김의 자세에 대하여 권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2:18-25절까지 사환들에게, 3:1-6절까지 아내들에게, 3:7절에서는 남편들에게, 3:8-12절에서는 성도들이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하여, 3:13절부터는 섬겨야 할 이유에 대하여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는 앞서 권면한 그 어떤 권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모든 권면을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의 삶 가운데 적용되어할 중요한 성품들을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들은 히브리서를 포함하여 14권이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서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디모데전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서신들은 바울이 순교되기 직전에 기록한 것들로서 마치 유서와 같은 서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본문을 통해서 성도들의 섬김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권면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에 대하여 가져야 할 자세(8)

본문에서 베드로는 5개의 형용사를 사용하여 성도들과 성도들 사이에 가져야 할 섬김에 대하여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이 권고는 바울의 서신 중 로마서 12:9-21절에 나타난 권고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과 같은 형식입니다.
그 첫째로 성도들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ὁμόφρονες, 롬12:16a)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같은(ὁμός)”이라는 단어와 “마음(φρήν)”이라는 단어를 합한 것으로서 한 가지 일에 뜻을 합하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견을 갖는다기보다는 각자가 서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는 뜻으로서 영적으로 하나의 끈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초대교회는 중요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었습니다(행1:14). 또한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후에도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2:46). 그리고 사도들이 첫 번째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된 후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성도들 사이에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4:32).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일어난 후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날 때 믿는 사람들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5:12).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핵심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일이었습니다(요17:11,21,22,23).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빌2:2_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비결은 (빌2:6-8)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자신을 겸손하게 할 때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자신의 생각이 가장 고상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둘째, 성도들은 서로 “체휼하며”(συμπαθείς, 롬12:15)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함께(σύν)”와 “고통을 받다(πάσχω)”라는 단어가 하나 된 단어로서 “동정심을 갖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고난 받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동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히10:34).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체휼입니다(롬12:15, 고전12:26, 히4:15).
주님은 고난 받는 사람들을 동정하셨습니다. 죽음과 관계없는 주님이셨지만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유대인들과 같이 함께 우셨습니다. 또한 주님을 임금 삼으려고 주님을 추종하던 5,000여 무리들이 광야에서 먹지 못한지 사흘이나 되었을 때 주님은 그들이 돌아가다가 쓰러질 것을 염려하여 그냥 돌려보내지 못하시고 기적을 베푸셔서 그들에게 음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주님의 뜻과 달랐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셋째, 성도들은 서로 “형제를 사랑하며”(φιλάδελφοι, 롬12:10)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사랑(φίλος)과 형제(ἀδελφός)라는 단어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형제애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결속된 형제애를 의미합니다. 형제사랑은 성경 어디에서나 강조되었습니다(롬12:10, 살전4:9,10, 히13:1, 벧후1:7).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형제사랑의 가장 모범적인 모델입니다(삼상18:1-3, 삼상20:17, 삼하1:26). 이들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원수가 될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서로 왕이 되기 위해서 피를 흘리면서 싸울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윗은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은, 자신은 그 다음이 되어야 할 사람으로 받고 다윗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형제사랑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슬렘 교도들 사이에 더욱 잘 갖춰진 성품입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가 믿는 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 사이의 형제사랑은 인종과 환경과 지역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원한 유업을 함께 받은 자들로서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벧전1:22).

넷째, 성도들은 서로 “불쌍히 여기며”(εὔσπλαγχνοι)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말은 좋은(εὔ)을 뜻하는 단어와 마음(σπλάγνον)을 뜻하는 단어가 합해진 말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감정을 가장 깊이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고후7:15, 몬1:7).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면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교회는 포근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성도들은 서로 “겸손하며”(τατεινόφρονες, 롬12:16b)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겸손한 생각”이라는 뜻으로 “겸손한(ταπεινός)”과 “생각(φρήν)”을 의미하는 단어의 합성어로 이루어졌습니다. 겸손은 신자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겸손은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입니다(빌2:6-9).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마11:29). 또한 당시의 문화에서는 왕들은 병거나 말을 탔지만 이 세상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님은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습니다(슥9:9, 마21:5).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승리와 심판의 주로서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실 것입니다(계19:11). 사도 바울도 겸손과 눈물로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를 돌아보았습니다(행20:19).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잠15:33, 18:12, 잠29:23). 주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교훈하였습니다(눅14:11). 비록 현대는 자기 소개시대라고 하지만 상대방의 장점을 칭찬해주고 본받는 시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빌2:3).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3:12)라고 하므로 겸손은 마치 옷처럼 필요한 성품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고 하시므로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길을 겸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고 하시므로 높아질 수 있는 비결 역시 겸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적으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16:18) 멸망의 선봉입니다(잠18:12). 이스라엘의 범죄의 핵심은 교만함이었으며 그 교만함 때문에 멸망되었습니다. 사단도 교만함 때문에 범죄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겔28:2,5,17). 원래 사단은 루시퍼(Lucifer)라는 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사14:12). 그러나 하나님의 총애를 받자 교만하여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심 때문에 타락하여 멸망을 향해 떨어졌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은 교만하여 왕위에서 폐한 바가 되어 그 영광을 빼앗겼습니다(단5:20).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 역시 마치 모든 나라와 부귀와 영광을 자신이 얻은 것처럼 생각하고 교만함으로 그의 나라는 메대와 바사로 나눠지고 말았습니다(단5:28).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각종 기구들을 그의 잔치를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잔치에 취해 있을 때 건너편 벽에 사람의 손만 나타나 글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뜻은 그가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13:4). 자랑은 교만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 자랑, 아내 자랑, 남편 자랑, 돈 자랑,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리는 일이 얼마나 주주 있었습니까?
또한 신자들에게 말세에 나타날 현상으로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은 말세에 나타날 성품이요 타락한 성품으로서 자기를 죽이는 성품입니다.


불신자들에 대하여 가져야 할 자세(9)

성도들이 성도들끼리는 잘 지내지만 불신자들과의 관계는 좋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이든 재해나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다른 종교기관에서 어려운 일 닥치는 것을 보고 달려가는 일들을 들은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야유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최근 10년 동안 한국의 종교상황은 기독교 인구만 1.6% 감소했고, 카톨릭이 74.4% 증가하였으며, 불교도 3.9% 증가하였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기독교가 사회에 좋지 않은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자료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비신자들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본문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보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9, 롬12:14a,17a). 이것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고하게 자신들을 해치며 욕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대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린 채로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23:34). 주님께서 좋은 환경 가운데 대적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두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로 고통 가운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 기도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마당에서도 그들을 이해하는 편에 서셨으며 그들이 보복을 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산상보훈을 가르치시면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습니다(눅6:27-29).
그러므로 성도들을 해치며 욕하는 자들을 향하여 도리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것은 좋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앙갚음이나 저주를 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고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자들이 부르심을 입은 이유(9b)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하였는데 “이를(this)”에 해당되는 것이 9절 후반부로서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기 위하여”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자들에게나 불신자들에게 보복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복을 빌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이요 또한 복을 유업으로 받기 위함입니다.

다음 이어진 말씀은 “그러므로”인데 이것은 9절 후반부를 적용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태도를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복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므로, 또한 복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나 불신자들에게나 동일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10)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신자들의 참된 소망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참으로 그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신자들은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신자들의 소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날은 신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날로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1:8,9).

이들이 해야 할 일들(10,11)
그러므로 신자들은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합니다. “입조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신자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말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바대로 말 한 마디 잘못하여 작대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족 관계나 성도들 관계에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특별한 악의 때문이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언로부터 온 것들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약3:1-12).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는 사람을 속이는 것을 말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헐뜯으며 비방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아야 합니다(11). “악을 떠나”의 “떠나”는 돌아서는 것으로서 그러므로 악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선을 행하는 것은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누구나 가장 어려운 일이 언행일치의 삶일 것입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실행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앞서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남의 허물을 탓하는 십지만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화평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서로를 세워주는 것입니다(딤후2:22). 현실적인 삶에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화평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삶을 가리킵니다.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상대가 불신자이건 신자이건 중요한 덕목입니다(롬12:18, 고후13:11, 살전5:13). 화평한 삶을 “좇으라”고 할 때 이것은 추적하는 것과 같이 뒤좇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녔지만 오히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그 손으로 스스로 해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다는 증거로서 사울 왕의 옷솔기만 칼로 살짝 벤다든가, 사울 왕의 창과 물통만 가져왔습니다. 신자들의 특징적인 삶은 원수를 스스로 갚지 않고 전능하신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불시;s자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 초기부터 신자들은 세상으로부터 이유 없는 고난과 비방과 모함을 받아왔습니다. 불의를 당하기도 했으며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고 하였으며,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2:17)고 하였고,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2:18)고 하였습니다. 또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신자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바울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13:11)고 하였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남녀가 함부로 입을 맞출 수 없습니다. 또한 동성들끼리도 그런 일은 낯선 행동입니다. 그러나 성경시대의 문화는 친절을 베풀 때, 사랑의 표현으로 입을 맞췄습니다. 입맞춤은 서로 사랑하고 화평을 나누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형제들 사이의 화편은 우선적인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싸움을 일삼는 지파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장자권이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지파를 무시했으며 항상 그들을 가장 윗자리에 세워주고 인정해 주어야만 동화가 되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은 요셉의 차자였지만 장자 므낫세보다 앞세웠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12지파 중 한 지파로 그 위상을 경상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요 그들의 어떠함 때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자처럼 그들의 지위를 스스로 높이려고 했으며 심지어 북왕국을 에브라임으로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왔을 때 에브라임 지파는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시비를 했습니다. 아마도 전리품을 나눌 때 그들의 몫을 챙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기드온은 싸움을 피하기 위하여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8:2)라고 그들을 치켜 주자 그들의 분노가 풀렸습니다. 기드온은 온유하고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교만한은 항상 이득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가 암몬 사람을 쳐부수고 돌아왔을 때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를 가로막고 그들을 초청하여 같이 싸우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삿12:1). 그러나 입다는 기드온과 같이 온순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브라임과 싸워 에브라임 중 42,000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어떻게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화평을 좇아야 하겠습니까?(12)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 대한 관심과 불신자들에 대한 관심은 전혀 다르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감찰하시고 그들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출3:7)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고 듣고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자기 백성을 감찰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32:10)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의 귀”는 의인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귀는 자기 백성들의 간구를 들으십니다(출3:7). 그러나 “주의 낮”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십니다. “주의 낮”은 하나님의 진노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자 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한 삶을 바라보고 참고 인내하며 신자들이건 불신자들이건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여 주님의 복음의 사자로서 그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4:16)
     
         
853   약속있는 계명(엡6:1-3, 송재국:2006-05-14)   821
852   그리스도 안의 부부관계(창2:18-25, 송재국.2006-05-21)   750
  섬김의 자세(벧전3:8-12, 송재국.2006-05-28)   790
850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창26:23~33, 송재국.2006-06-04)   866
849   육신의 힘 겨루기(송재국.2006-06-11)   832
848    지금이 기도할 때(눅22:39-46, 송재국.2006-06-18)   882
847   어떤 믿음의 사람(이삭)의 생애에 대한 평가(송재국.2006-06-25)   950
846   하나님을 바라라(요6:1-14, 송재국.2006-07-02)   769
845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송재국.2006-07-09)   817
844   (김응환.2006-07-16)   1007
843   요셉의 생애에 나타난 그리스도-1(창37:1-28, 송재국.2006-07-23)   861
842   요셉의 생애에 나타난 그리스도-2(창37:29-36, 송재국.2006-07-30)   919
841   성장하지 못하는 신앙의 원인(마13:4, 송재국.2006-08-27)   907
840   꿈꾸는 자(창37:5-11, 송재국.2006-09-03)   791
839   절망의 터널에서(창37:12-36, 송재국.2006-09-10)   820
838   그리스도인의 인격형성(창37:1-11, 송재국.2006-09-17)   776
837   성공의 비결(창39:1-6, 송재국.2006-09-24)   806
836   유혹(창39:6-13, 송재국.2006-10-01)   851
835   무고한 고난을 당할 때(창39:7-20a, 송재국.2006-10-08)   855
834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계22:10)" (이종진.2006-10-15) 1   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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