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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의 부부관계(창2:18-25, 송재국.2006-05-21)
   관리자   | 2006·08·14 18:16 | HIT : 749 | VOTE : 115 |
그리스도 안의 부부관계(창2:18-25)

이미 매스컴을 통해서 알려진 바 있지만 한국의 이혼율은 세계적입니다. 통계청 자료분석결과에 의하면 2,003년도의 이혼건수(167,096)는 혼인건수(304,932)의 54.8%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혼인건수는 4년간 8.7% 감소했는데 이혼건수는 39%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가정문제 상담가들은 한국의 이혼문제의 해결방법들로서 “부부 모두 유교의 수직윤리에서 해방되고 가부장적 상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혼을 제기하는 아내들의 대부분이 권위주의적인 남편의 태도를 호소한다, 남편이 아내를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결혼관에서 벗어나 동반자적이고 우애적인 결혼관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역설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혼의 배경이 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자는 변화무쌍한 현대문화에 빨리 적응하는데 남자는 여전히 유교적 가부장 근대적인 풍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시한 최초의 일부다처(창4:19)는 가인의 후손 라멕이었는데 그는 아다와 씰라라는 아내들을 두고 많은 강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혈육과의 결혼관계를 깨뜨린 사람으로는 헤롯으로서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마14:3, 막6:17). 더구나 그는 책망하는 세례 요한을 헤로디아의 유혹에 말려들어 참수시켜 죽이게 만든 불행을 낳았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의 부부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왜 부부를 창조하셨고 인간 사회에 부부관계를 만드셨을까요?


Ⅰ.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므로(18-20)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한 몸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가정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와를 창조하신 것은 부부로서 행복하고 만족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18).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대로 인간의 행복과 즐거움을 형성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뜻과 반응을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만족을 위하여 수고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그것들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19). 동물들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다는 것은 아담에게 그 소유권을 부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아담이 그 동물들의 이름을 어떻게 짓나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 동물들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을 보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자녀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주며 그것을 보고 좋아하는 부모와 같은 심정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짐승들의 이름을 지었지만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19b,20a). 아담이 지은 이름이 바로 그들의 이름이 되었지만 아담은 특별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아담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족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동물들과는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있을 때 아담은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맞이하면서 부른 노래는 23절에 나타나는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노래 불렀고 이어 하와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아담이 동물들을 소유하고 그 이름들을 지었으면서도 여전히 별로 반응이 없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남자 혼자는 불완전했습니다. 돕는 배필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하나님께서 주신 돕는 배필이요 여자는 특히 아담에게 있어서 돕는 배필입니다.

기독교의 개혁자 루터는 카톨릭 수녀였던 16세 연하의 캐더린 폰 보라와 결혼했습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남자는 집을 지을 수 있으나 여자만이 그 집을 가정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조력자, 반려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역할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즉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고전11:9)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4)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편 우위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남녀의 차이는 신체적 기능적 차이요 인격적인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녀가 차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11:11)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창1:27).
사람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부부는 하나님께서 그 필요를 따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듯을 이루어가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Ⅱ. 부부의 관계의 기초는 한 몸이라는데 있다(창2:21-23)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항상 만족해 하셨으며 “보시기에 좋았더라”(1:4,12,18,21,25,31)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의 돕는 배필을 만드실 때 아담을 만드시듯이 흙으로 몸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므로 하와를 만드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를 만드실 때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창조의 유일한 방법을 의미합니다.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하와를 만드실 때 하나님은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 가운데 아담을 만드신 것은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하와를 만드신 것도 또한 유일한 방법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두 번 다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를 창조하실 때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셔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와는 아담과는 달리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의 일부로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들었으므로 다시 한 번 더 정제한 재료로서 하와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남성들과는 달리 마음과 몸이 더 세밀하고 아름답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와가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의 일부분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원래 한 몸이었습니다. 남녀가 결혼을 통해서 부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래의 한 몸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간, 서로가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무시한다면 자신의 몸의 일부를 무시하는 것이요 아내가 남편을 무시한다면 아내는 자신의 몸의 근원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서로 존경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무엇으로 단장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자들의 단장에 대해서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3:3-6)고 하셨습니다. 사라는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단장하였습니다. 사라에게 있어서 그녀의 단장은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순종함으로 자신을 단장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5:22-24)고 하였습니다.
남편들의 단장에 대하여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하게 여기므로 자신을 단장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남편들에게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8)고 하였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고 하셨습니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므로 자신을 희생함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므로 서로의 소유이지 각자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7:3,4)고 하였습니다.


Ⅲ. 독립된 개체이므로(24,25)
부부는 하나 안에서의 독립된 개체입니다. 단순한 독립이 아닙니다. 하나 안에서의 독립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한 몸이지만 각각 다른 인격과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부 사이에는 단순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서로 간의 사이를 넓게 만들고 마음을 상하게 만들며, 하나가 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본문에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24)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부모의 통제와 보호로부터 떠나는 독립성, 어느 한 쪽의 지배를 받거나 예속되는 것이 아닌 성숙한 존재로서의 서로 간의 연합성, 결혼을 통해서 두 사람이 신비롭게 한 몸을 이루는 합일성이 성취됩니다. 이와 같이 아담이 그 부모를 떠남으로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그 아내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부는 부끄러움에도 사이가 없는 관계입니다. 비록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서로 사이에 부끄러운 일들을 보더라도 부부 사이에는 그것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흉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이 부부 사이에 예의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라도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부는 서로의 흠을 보아도 그것이 흉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아내들의 푸념은 그럴만한 서로 간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여성들, 여전히 변화되지 못하는 남편들의 가부장적 태도들, 이런 것들이 서로 몸을 붙이고 살면서도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성남자, 금성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간 잘 통하지 않는 부부 말합니다. 그나마 연애할 때는 이런저런 노력을 하던 남자들이 “남편”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는 순간 바뀝니다. 그러나 여자들도 동일하게 결혼 후에도 아름다움과 정숙함과 남편을 존경함으로 매력을 간직해야 합니다.
특히 아내들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어떤 아내의 목매인 소리입니다. “누가 빨래까지 해달라고 했나요. 그저 옷을 뒤집어 내놓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걸 안하더라고요.”라는 것입니다. 빨래까지 할 수 있는 남편, 그러면서도 아내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듣지 못하는 남편, 이것은 여성들의 세심한 감성적인 요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이런 비슷한 사례들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단축키 한번만 누르면 되는데 집 나가면 전화 한통 없어요.” 결혼 3년차인 김 모(28)씨는 점점 잔소리꾼이 돼 간다는 생각에 속상해 합니다. 남편에게 함께 생활하면서 불편한 점들을 말해보지만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고 나서는 가스밸브를 잠근다거나, 다 쓴 수건은 다시 걸어놓지 말고 빨래통에 넣어달라는 것 등이 김씨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조금만 신경쓰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지만 남편의 습관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김씨는 “혼자 밥 먹을 때 반찬을 접시에 덜어 먹지 않고 반찬통 째로 놓고 먹거나 다리미를 쓰고 나면 제자리에 넣어두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서 “어쩌다 그럴 수는 있겠지만 매번 같은 말을 하게 만든다.”면서 “이제는 얘기하는 게 지겹다.”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또한 남편들의 가정에 대한 인식은 “웃으면 내 자식, 울면 네 자식”이라는 식입니다. 대체적으로 남편들은 육아 자체에 책임의식이 전혀 없다는 데 아내들은 화가 난다고 합니다. 요즘 대기업에서는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는데 남편들에게도 육아에 안내처럼 동일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두 돌 된 아이를 둔 어떤 주부는 남편이 얄밉기만 하다고 합니다. 맞벌이를 해 낮 시간에는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지만 밤에 아이를 돌보는 것도 오직 아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재롱떨 때는 “아빠한테 와봐.”하면서도, 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하거나 떼를 쓰고 울 때는 아내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는 ”갓난아기일 때부터 나는 밤 새 우는 아이 때문에 잠을 못 잤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은 다른 방으로 가 쿨쿨거리면서 잤다“고 말했습니다.

젝시인러브(www.xyinlove.co.kr) 부설 연구소의 러브코치 정영씨는 “전화상담 가운데 고부간의 갈등이나 성적인 고민만큼 많은 것이 남편과의 대화 문제”라면서 “대화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아내들의 사소한 바람이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화를 하더라도 그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다. 정씨는 “아내들은 자신의 바람을 얘기할 때 비난조나 명령조로 해서는 안 된다.”면서 “특히 부부싸움 도중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런 얘기들이 그저 잔소리로만 들린다.”고 지적했습니다. 아울러 “남편 쪽에서는 아내가 얘기할 때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부부는 한 팀이라는 생각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대화를 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 서로의 말을 들으려는 태도, 이런 것들이 문제 해결에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부는 결혼으로 말미암아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의 부부관계는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었느냐 와는 무관하게 매일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창조적일 때 사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며 더 사랑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관계를 허락하신 것은 부부여야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변화된 현대사회에서 부부는 서로 그 관계의 원활한 진보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노력하는 부부여야 합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4:16)
     
         
853   약속있는 계명(엡6:1-3, 송재국:2006-05-14)   821
  그리스도 안의 부부관계(창2:18-25, 송재국.2006-05-21)   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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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5   무고한 고난을 당할 때(창39:7-20a, 송재국.2006-10-08)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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