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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바라라(요6:1-14, 송재국.2006-07-02)
   관리자   | 2006·08·14 18:25 | HIT : 768 | VOTE : 112 |
하나님을 바라라(요6:1-14)

세상의 문제라도 세상에서 다 오전히 해결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라들이 질병과 마음의 괴로움과 경제사정과 자녀들의 문제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의 해결점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확실한 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문제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신앙적인 것이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가능합니다.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는 고난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나사렛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더러는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나심을 전파한다는 것 때문에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버림받고 쫓겨나 유리하는 생활을 하던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이유 때문에 물이 없는 깊은 웅덩이에 갇혀 고생의 떡과 고통의 물을 마시면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의 웅덩이에서 고통 받고 있었지만 그 민족을 위해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받느냐는 것은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어제와 오늘과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은 사람이든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까지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성경에 대해서도 잘못된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몰려와 많은 군중을 이뤘습니다(1). 그런데 때가 지나고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마14:15). 또한 군중들은 먹지 못하며 무려 사흘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돌아가다가 길에서 쓰러질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주님은 군중들을 위하여 빌립에게 질문하셨습니다(5). 본문에 기록된 대로 주님은 스스로 어떻게 해결하실 것을 아시면서 빌립을 시험하고자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때때로 제자들을 시험하셨는데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주님은 때때로 시험하십니다(test).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 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을 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갑작스럽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병행되는 공관복음서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 막6:37, 눅9:13)고 하셨습니다. 그 때 빌립은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고로 대답했습니다. 그는 계산적이었습니다(7). 그는 재빨리 군중들의 수에 비하여 얼마만큼의 빵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산해 내었습니다. 또 그 비용이 200데나리온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산해냈습니다. 그의 계산은 합리적이며 적절했을지라도 이러한 빌립의 태도는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우리는 할 수 없다”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자신으로서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빌립만의 생각이 아닌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곳은 빈들이었으며 마을과 떨어져 있었고 또 갑자기 그 많은 인원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빵을 사온다는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빌립과 제자들은 현실주의자요 합리주의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주님의 의도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이성적인 판단에 의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을 이성으로 판단하는 사고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때 안드레는 빌립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8,9). 그는 주님의 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제자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자마자 그의 형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께 나오면 무엇인가 해결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드레는 어린 아이의 한 끼니의 음식을 구해왔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았던 것입니다. 빌립은 아예 될 수 없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안드레는 적은 것이라도 주님께 가지고 오면 주님께서 해결점을 찾아주실 것이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안드레의 생각도 그 적은 것이 그 많은 군중들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은 현실과 이상의 간격을 메우지 못합니다. 오직 믿음의 눈만이 그 간격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 적은 것이 그 많은 군중들에게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께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이 작은 헌신과 정성들이 주님께 드려졌을 때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것, 적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문벌 좋은 성도나, 재력가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손길들이 주님께 드려졌을 때 주님에게 큰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적은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적은 것을 가지고 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고만 생각될 따름입니다.

그 때 주님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무에서 이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적은 손길을 통해서 이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없는 데서도 얼마든지 이적을 나타내실 수 있으십니다.
주님은 한 어린 아이의 몫에 불과한 빵과 생선을 보시고 군중들을 잔디에 앉게 하셨습니다(10). 그 수효가 남자만 무려 5,000명쯤 되었습니다. 부녀자들까지 합하면 2-3만 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수의 군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군중들을 혹 100명, 혹 50명씩 무리를 지어 앉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자들은 순종했습니다. 군중들도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주님은 축사하신 후 떡과 고기를 군중들이 원하는 대로 나눠주셨습니다(11). 주님은 적은 것이라도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적은 것에 감사하는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의 축복과 역사에 대하여 불평하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 많은 군중들에게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능력을 베푸실 수 있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떡과 고기를 “앉은 자들에게”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앉은 자들”은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제자들도 군중들도 주님께서 해결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순종할 수 있었으며 놀라운 이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이적인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주님은 하인들에게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요2:7). 그 때의 상황은 빈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있을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때였습니다. 바쁘게 뛰어다녀야만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돌 항아리와 같은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채워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을 바라봄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창15:1-5).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밤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창15:5). 별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었습니다(6).
그 당시 아브라함의 현실은 절망적이었습니다(롬4:19).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믿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그의 아내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바랄(hope) 수 없는 중에 바라고(hope) 믿었습니다(롬4:18). 아브라함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가운데서 소망을 가졌다고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도저히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현대어 성경).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진 후에도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창13:14-17). 조카 롯으로부터 버림받고 남은 것이라고는 싸늘한 광야뿐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처참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서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창13:14,15).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각을 바꾸도록 가나안의 모든 땅들을 바라보게 하셨으며 종과 횡으로 다녀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 감사의 뜻으로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은 축복뿐만 아니라 저주에도 적용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쳐다보았을 때 매력을 느꼈습니다(창3:6). 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입니다. 보기에도 아름다웠습니다. 또한 먹는다면 지혜롭게 할 것처럼 탐스럽게 생긴 나무로 보였던 것입니다.
만약 뱀이 하와에게 빠져나올 수 없도록 유혹했더라도 하와가 그 실과나무를 쳐다보지 않았다면 하와는 그 실과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의 마음에 살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실과를 먹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롯의 아내의 경우도 바라보므로 저주를 받았습니다(창19:17). 하나님은 롯과 그 가족들에게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19:17)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도망하라, 도망하면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 들에 머무르지 말라,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다”(창19:2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남편 롯이나 두 딸들과는 달리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가족이 일구어 한동안 살아온 거처를 뒤에 남겨두고 탈출한다는 것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것들이 불에 탄다는 것은 앞으로의 삶이 절망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 결과 패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유황불에 타고 있는 소돔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돌아보거나 머무르지 말라고 하신 것보다 불에 타고 있는 그의 소유가 그를 더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꿈을 갖고 살았으며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창37:1-11).
야곱은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과 그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습니다(창28:10-15, 35:1-3). 그는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결정적인 상황이 일어날 때 벧엘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야곱은 또한 그의 소유를 결정할 때 점 있는 것이나 얼룩무늬 있는 것이나 아롱진 것이 나오도록 양들이 물을 먹거나 새끼치기를 할 때 나무껍질의 얼룩무늬를 바라보도록(향하도록) 했습니다(창30:37-43). 얼룩무늬 나무에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게 했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태도 또한 극한의 시련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합2:1).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마치 방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이해하지 못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외치기를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고 했습니다. 마치 시편기자가 이르기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63:1-2)라고 외친 것과 같이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타락하고 혼돈스러운 이 세대에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 꿈을 현실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들만 바라본다면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바라본다면 실망할 것이요 우리의 믿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지만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미래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끝까지 믿고 잡으려고 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세상과 사람을 의지하고 따르려고 한다면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시62편). 거기에만 우리의 소망과 안식처가 있으며 해결점이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2편)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4:16)
     
         
853   약속있는 계명(엡6:1-3, 송재국:2006-05-14)   821
852   그리스도 안의 부부관계(창2:18-25, 송재국.2006-05-21)   750
851   섬김의 자세(벧전3:8-12, 송재국.2006-05-28)   790
850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창26:23~33, 송재국.2006-06-04)   866
849   육신의 힘 겨루기(송재국.2006-06-11)   832
848    지금이 기도할 때(눅22:39-46, 송재국.2006-06-18)   882
847   어떤 믿음의 사람(이삭)의 생애에 대한 평가(송재국.2006-06-25)   949
  하나님을 바라라(요6:1-14, 송재국.2006-07-02)   768
845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송재국.2006-07-09)   817
844   (김응환.2006-07-16)   1007
843   요셉의 생애에 나타난 그리스도-1(창37:1-28, 송재국.2006-07-23)   861
842   요셉의 생애에 나타난 그리스도-2(창37:29-36, 송재국.2006-07-30)   919
841   성장하지 못하는 신앙의 원인(마13:4, 송재국.2006-08-27)   907
840   꿈꾸는 자(창37:5-11, 송재국.2006-09-03)   791
839   절망의 터널에서(창37:12-36, 송재국.2006-09-10)   820
838   그리스도인의 인격형성(창37:1-11, 송재국.2006-09-17)   776
837   성공의 비결(창39:1-6, 송재국.2006-09-24)   806
836   유혹(창39:6-13, 송재국.2006-10-01)   851
835   무고한 고난을 당할 때(창39:7-20a, 송재국.2006-10-08)   854
834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계22:10)" (이종진.2006-10-15) 1   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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