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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한 속죄(2)
글쓴이 송재국  [홈페이지] 2019-04-12 08:03:44, 조회 : 1,305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한 속죄(2)

오늘날 교회에서는 부정적인 단어(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단어(말)를 사용하여 용기를 북돋아주고 “나도 할 수 있다”를 심어주기 위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강단은 어떤 곳인가?-“나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다”를 깨우쳐 주는 곳입니다.
긍정적인 이야기는 교회가 아니더라도 책이나 TV에서나 어디에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강단은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강단을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는 곳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안내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과 참된 소망에 대해 전해드리기 위해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으며, 죄와 심판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길-왜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소망 없이 살아가고 있으며, 영원한 사망과 심판 아래 처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왜 죄를 용서함 받아야 할까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17:9-11)

자고새(멧새, 딱새)가 자기가 낳지 않은 뻐꾸기 알을 품고 부화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뻐꾸기 새끼는 자고새 새끼를 땅으로 떨어뜨려 다 죽이고 혼자서 양육을 받습니다. 뻐꾸기 새끼는 자립할 정도로 성장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길러준 엄마 자고새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자고새는 애지중지 뻐꾸기 새끼를 기르지만 뻐꾸기 새끼는 자기 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고 혼자 자라다가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 받지 못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얻고 쌓고 모은다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유익될 것이 없다는 것은 마치 자고새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

다음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치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7)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자 그들은 곧 자신들의 수치가 드러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그 치마는 자신들의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불과하였습니다. 햇볕이 비취자 그 치마는 곧 말라 부서져버렸습니다. 앉았다고 일어나도 부서졌습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부서졌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반복해서 치마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것은 하루에도 몇 번식 날마다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든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는 영구적이지 못했습니다. 쉴 사이 없이 반복해야 하는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안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는 인간의 노력과 지식과 지혜로는 죄를 완벽하게 덮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입히신 짐승의 가죽치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수치를 덮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지만 그것으로는 그들의 수치를 덮을 수가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 가죽옷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완벽하게 덮을 수 있었습니다. 햇볕이 뜨겁게 내려쬐어도 그 치마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안자다가 일어나거나 누워서 잠을 자고 일어나도 그 치마는 부서지지도 망가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치마는 완벽하게 그들의 수치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덮기 위해 만든 가죽옷은 생명을 희생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가 범했지만 죄의 대가인 죽음은 아담과 하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짐승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덮기 위해 만드신 가죽옷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므로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의 속죄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제사

히브리서 10장 11절과 12절에는 각각 구약시대의 속죄제사와 예수님의 속죄제사를 비교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히10:11)
제사장들은 날마다 서서 반복해서 같은 성격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만약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가 100만 명이었다면 제사장들은 최소한 매일 100만 번의 속죄제사를 드렸을 것이며 그 속죄제물은 최소한 100만 마리의 송아지나 염소나 어린양이 희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도 하루에 한 번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으로는 어마나 많은 죄를 자주 범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완벽한 죄사함을 위해서는 하루에도 수백만 번의 희생제사가 드려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는 속죄제사가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반복할 수 없었으며, 속죄제사를 드리기 위해 짐승을 끌고 줄을 서서 기다렸을 것입니다.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는 반복적인 제사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주”는 한 사람당 하루에도 몇 번씩일 수도 있으며, 반복된 속죄제사는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드려진 속죄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짐승으로 드려지는 속죄제사는 죄를 없게 하지 못했습니다. 반복해서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죄제사는 죄를 없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을 드려진 속죄제사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대신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10:12)
그리스도는 짐승으로 드려진 속죄제사와는 달리 죄를 위하여 “한(one)”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의 영원한 속죄제사로 드리셨습니다. “영원한 (속죄)제사”는 영원히 효력 있는 속죄제사로서 모든 죄를 위한 속죄제사가 완벽하게 드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을 드리는 제사장들은 “매일 서서 ~자주 같은 (속죄)제사를” 반복하였습니다. 앉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속죄제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속죄제사를 반복하고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히 효력 있는 속죄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속죄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속죄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리시며 죽음을 당하셨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필요한 속죄제사를 다 끝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의 속죄제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죄 값이 다 갚아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희생제사처럼 생각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5,26)

죄사함에 대해 수많은 오해가 있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회개기도입니다. 끝도 없이 반복해서 회개기도를 하는 것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회개기도입니까?
신약성경에 “회개하다(μετανοέω)”라는 동사가 34회 나타나는데 그 중에 14회가 불신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나 목적(의도)을 바꾸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 짐승으로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국가적으로는 7월 10일 대속죄일에 한 번 해마다 지성소에서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죄를 범하고 죄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속죄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서 무엇이 반드시 필요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죽음 즉 생명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처럼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음 곧 생명의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또 다시 생명의 희생 즉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주 예수님의 죽음으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 또 다시 십자가에서 죽어 주십시오. 라고 요청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은 증거하기를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음을 당하시므로 “다 이루었다” 즉 “다 갚았다”고 선언하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갚았다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 갚지 않았습니다. 저를 위해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어 주십시오. 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오해입니까? 이단도 다른 복음이지만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다른 복음입니다.
찬송가에도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242)라는 곡에는,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뿐이라 주님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기는 거룩한 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분들만 계시며 거룩한 분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가 털끝만큼만 있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실컷 회개기도한 후에 “이 부족한 죄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고 기도를 끝마칩니다. 용서해 달라고 회개기도 한 후 “이 부족한 죄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의인이어야만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얻어야만 구원받는데 언제 완전한 의인이 되겠습니까?
이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제사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죄 값이 갚아졌습니다. 모든 죄 값이 완벽하게 다 지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Τετέλεσται)”(요19:30)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외치셨던 “다 이루었다”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일까요? “다 이루었다”는 것은 “다 갚았다”는 의미로서 상업적인 용어입니다. 계산이 이미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지불할 의무가 없다는 뜻입니다. 빚을 다 갚았다면 더 이상 갚아야 할 의무가 없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빚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빚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몇 번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몇 번에 걸쳐 우리 죄를 갚으셨습니까? “단번에”, “한번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죄에 대한 구속이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는 죄사함과 관련하여 “단번에(once of all)” 혹은 “하나(one)”라는 말이 7번이나 나타납니다(히7:27, 9:12,28, 10:2,10,12,14).

히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once for all)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once for all)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once)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once for all)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once for all)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one)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one)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도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단번에”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고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단번에” 갚으셨다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완전한 속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단번에(once for all)”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음 찬송가에도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302장)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밝히시는 주의 보혈
예수님의 그 귀한 피 찬송하고 찬송하세

확신의 말씀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을 받았으니(you have been saved)”-σεσῳσμένοι(현재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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